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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 유도등이 초록색인 이유,
그것이 알고 싶다!

각종 재난 상황으로 건물 안에서 길 잃고 헤맬 때, 우리를 안전한 외부로 안내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비상구 유도등이다. 그런데 문밖으로 달려 나가는 자세의 녹색 픽토그램(Pictogram, 의미를 전달하는 이미지)을 보면 자못 궁금해진다. 세상엔 다양한 색상과 형태가 있는데 어떤 이유로 정해져서 이처럼 널리 쓰이고 있는 걸까?

북미 지역에서 주로 쓰는 붉은색 비상구 유도등(왼쪽)과 유럽에서 쓰는 픽토그램(오른쪽)

녹색의 비상구 유도등은 우리 눈에 상당히 익숙하다. 자연히 전 세계적으로 통용한다고 믿기 쉬운데,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단다. 서양권, 특히 북미에선 강렬한 붉은 색의 엑시트(EXIT)가 기본이다. 또, 유럽에선 멀리 떨어진 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형상의 픽토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같은 차이가 무려 28년간 격렬한 논쟁의 주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18명이 사망한 단일 건물 역사상 최악의 화재가 남긴 교훈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현재 국제적으로 가장 인정받고 있는 비상구 유도등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형태가 맞다. 이미 ISO 국제 표준(ISO 6309)으로 지정한 바 있으며, 대한민국의 국가표준(KS S ISO 7001:2014) 역시 동일하게 따른다.

1972년 발생한 일본 오사카 센니치 백화점 화재

오늘날의 디자인이 탄생한 배경은 지난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일본은 단일 건물 화재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라고 일컬어지는 센니치 백화점 화재(千日デパート火災)로 슬픔에 잠겨있었다. 118명이 사망하고, 78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희생이 컸던 건 다름 아닌 비상구 식별이 어려운 탓이었다. 따라서 정부는 단순히 글씨(非常口)로 표기해온 그간의 방식에서 벗어나 더욱 눈에 띄는 도안을 공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전국에서 3,300건에 이르는 출품작이 모였고 최종 물망에 오른 4개 후보 가운데 코타니마츠 토시후미(小谷松敏文)의 작품이 영예를 안았다.

최종 물망에 오른 4개 도안과 선정의 영예를 안은 코타니마츠 토시후미의 입선작(맨 왼쪽)

그러나 해당 디자인을 그대로 쓰기엔 무리가 있었단다. 픽토그램을 보면 급하게 달려가는 듯한데, 실제로 비상구에서 서둘러 뛰다간 사고 나기 십상이라는 지적이 뒤따랐다. 이러한 의견을 모아 일본디자인학회장을 역임한 전문가, 오오타 유키오(太田幸夫)가 개선안을 마련했다. 운동선수의 움직임을 관찰해 다리 각도를 살짝 바꾸니 원하는 메시지를 한결 손쉽게 전달할 수 있었다.

오늘날의 비상구 유도등 디자인을 만들어낸 디자이너, 오오타 유키오

인간의 망막 시세포가 어둠 속에서 손쉽게 알아보는 컬러는 녹색

홍콩은 눈에 띄는 녹색광에 엑시트(EXIT)라는 문자를 혼용한 비상구 유도등을 사용한다

이로써 완성한 디자인은 과학적 근거마저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인간의 망막 시세포 중 깜깜한 장소에서 물체를 보는 데 관여하는 간상세포는 약 500nm의 파장을 가진 녹색을 가장 잘 흡수한다. 그러니 주위가 어둡거나 연기가 자욱한 긴급 상황에도 무난히 식별해낼 수 있다. 야간 운전의 경우를 고려해야 하는 고속도로 표지판과 자동차 계기판이 그린 계열인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또, 심리학적으로 녹색은 안정을 유도하고, 사회 통념상 안전, 진행, 구급 등의 의미가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허둥지둥하지 않게 이끌어준다.

1982년 일본(왼쪽)과 소련(오른쪽)이 ISO에 제출한 비상구 유도등 도안

여기에 힘입은 일본은 1982년 자체적으로 제작한 비상구 유도등 도안을 ISO에 제출해 국제 기준으로 사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소련이 먼저 제출한 안이 비슷한 형태를 띠는 바람에 경합이 벌어졌다. 결국 일반 조명과 연기가 퍼진 상황에서의 시인성 실험을 시행한 끝에 일본은 채택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붉은색 비상구 유도등 고집하는 북미 지역, 변화의 바람이 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져 대다수 국가에서 쓰이고 있는 녹색 비상구 유도등이지만, 북미에선 유난히 인색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곳에선 여전히 붉은색이 대세인 까닭이다.

1911년 뉴욕 맨해튼의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Triangle Shirtwaist) 공장 화재로 내부에 갇힌 어린 여공 146명이 사망하면서 비로소 비상구 유도등 설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미국은 일찍이 미국방화협회(National Fire Protection Association, 이하 ‘NFPA’)를 세웠다. 또, 인명안전코드(Life Safety Code NFPA 101)를 수립해 관련 기준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30년대에 글자 크기와 획 폭을 다르게 시험하며 빨간색 엑시트(EXIT)라는 문자만으로 유도등을 표시한 게 일종의 전통으로 남았다.

1911년 뉴욕 맨해튼에서 발생한 트라이앵글 셔트웨이스트 공장 화재

아직 많은 주(州)가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예전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나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다행히 언어 표기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이민자와 여행자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인식이 점차 퍼지고 있어서다. 또, 위험, 금지 등을 뜻하는 빨간색이 피난자를 오히려 불안에 빠뜨려 그 자리에서 얼어붙거나 걸음을 멈추게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치열한 접전을 거쳐 뉴욕은 2006년부터 고층 건물 비상구에 ISO 기준을 적용하도록 화재 코드를 변경했다. 같은 대열에 합류하는 주는 계속해서 늘어날 전망이다. 어쩌면, 곧 우리는 어딜 가든 녹색 비상구 유도등을 보게 될지 모르겠다.

글. 오민영(소방안전플러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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